약자를 향한 잔혹함, 공격자와의 동일시
스스로를 피해자라 여기며 가해자의 가면을 쓰는 심리

필자의 어머니는 경상북도 어느 시수준의 도시에서 태어났다. 물론, 6.25세대로써 시라고 해봤자 당시에는 아주 작은 시골이었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나이가 되어서 어머니가 말했던 특정 지역 사람에 대한 편견과 한 없는 독재자에 가족에 대한 대를 잇는 사랑-가끔 아들인 나보다 더 사랑하는 거 아닐까 하는, 뭐 물론 아니겠지만 묻지는 않았다-의 이유에 대해 궁금하게 여기고 여러가지 역사의 뒷조사를 해본 적이 있다. 인생사에 답은 없지만 이를 심리학자니 그럴 듯한 이론으로 좀 썰을 풀면서 이해하고자 했다. ‘공격자와의 동일시(Identification with the aggressor)’란 용어가 있다. 정신분석학에서 사용하는 방어기제의 하나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딸이자 아동 정신분석의 개척자인 안나 프로이트가 처음 제시한 비슷한 개념으로, 개인이 극심한 불안이나 위협 상황에서 자신을 공격하는 대상과 심리적으로 같아지려는 현상을 말한다. 이는 압도적인 공포 앞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약자의 슬픈 역설적인 생존 전략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특성, 태도, 심지어 공격성까지 내면화함으로써, 수동적으로 고통을 감내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가해자가 가진 힘을 나누어 가진 듯한 환상을 통해 무력감을 극복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임상적으로는 공격자와의 동일시는 심각한 트라우마, 특히 아동기 학대 경험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고도 설명된다. 지속적인 폭력에 노출된 아이는 자신이 약하고 무력하다는 사실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이때 아이는 자신을 학대하는 부모의 공격적인 모습을 무의식적으로 학습하고 닮아간다. 이를 통해 ‘나는 더 이상 맞기만 하는 약한 존재가 아니라, 때리는 힘 있는 존재’라는 착각 속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물론, 현상론자인 나는 이런 심층적인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면 쓸모 있는 그럴 듯한 이야기로 모순되게 이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암튼, 그래서 이 방어기제는 일시적으로는 생존에 도움을 줄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피해자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폭력의 대물림을 야기하는 비극의 씨앗이 된다고 설명한다. 실재 그런지는 몰라도 뭐든 임상장면에서는 흔히 보게 된다. 피해자로 알고 동정하는 마음에 그 당사자가 자신의 자식을 같은 식으로 대하는 모습에서 삶의 비극이 그려지기도 한다. 어쩜, 자신의 고통을 직면하는 대신, 자신보다 더 약한 대상을 찾아 자신이 당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공격성을 표출하는 ‘전치(Displacement)’ 현상으로도 설명된다. 이는 마치 인질이 인질범을 사랑하는 스톡홀름 증후군 처럼 외부의 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라면, 공격자와의 동일시는 내 안의 공포와 하나가 되려는 몸부림과 같다. 그래서, 가해자의 저주란 결국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세뇌를 작동시키는 것이 아닐 까 한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이러한 심리 기제는 개인을 넘어 집단적 현상으로도 확장될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친일파의 등장은 이를 설명하는 비극적 사례가 될 수 있다. 식민지라는 거대한 폭력 앞에서 일부는 생존과 권력을 위해 지배자인 일본 제국주의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길을 택했다. 그들은 지배자의 논리를 내면화하고, 같은 민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데 앞장섬으로써 자신들이 더 이상 피지배 민족이 아닌 지배자의 일부라는 심리적 위안을 얻으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에 메달은 사람들이 로마의 집정관이 아니라 식민지의 유대 땅에서 로마인이기를 바라던 유대인들인 것 처럼 말이다. 최근 특정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나타나는 극단적인 약자 혐오와 역사 왜곡 현상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해 볼 여지가 있다. 사회·경제적 박탈감과 무력감에 시달리는 일부 청년들이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인식하면서도, 그 분노를 사회 구조가 아닌 여성, 특정 지역, 혹은 역사적 피해자, 사고의 희생자, 무력을 동반한 폭력으로 부터 고통 받은 사람들과 같은, 자신들이 규정한 ‘더 약한 대상’에게 돌리는 것이다. 그들은 과거의 권위주의적 독재자나 강자를 찬양하며 그 힘을 빌려와, 약자를 조롱하고 폄훼함으로써 자신의 초라함을 잊으려는 심리적 퇴행을 볼 수 있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 융은 인간에게는 누구나 외면하고 싶은 어두운 이면, 즉 ‘그림자(Shadow)’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건강한 자아는 자신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통합하려 노력하지만, 미성숙한 자아는 이를 부정하고 외부의 특정 대상에게 투사한다. 약자를 향한 비이성적인 가학과 혐오는 어쩌면 우리 사회가, 혹은 개인이 마주하기 거부하는 자신의 무력함과 열등감이라는 그림자를 다른 이에게 떠넘기는 행위일지 모른다. 가장 경멸하는 대상의 모습을 닮아감으로써 잠시나마 강해졌다고 느끼는 이 아이러니는, 결국 자기 자신을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문화, 권력이 없는 약자가 권력자를 흉내내서 힘을 과시하려는 퇴행의 이면에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기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비단 한국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상화된 권력자와의 동일시는 나라를 팔아먹어서 자기 자신과 자식이 희생되어도 상관없는 정신병적인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은 나도 자유롭지 못 할 것이다. 확신의 순간 정신병이 시작되는 지점일 수 있다는 불완정성... 공격자의 가면을 쓰는 행위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피해자라는 가장 절박한 외침일 수 있다. 그들이 드러내는 날카로운 이빨은 사실 누군가에게 물어 뜯겼던 공포의 기억을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은 아닐까 한다. 아마도 그래서 더욱 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