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근거성 (Groundlessness)
발 디딜 곳 없는 세상에서 중심 잡기

무근거성(Groundlessness)이란 말 그대로 ‘뿌리나 근거가 없음’을 뜻한다. 이는 우리의 삶과 자아, 그리고 세계를 지탱하는 절대적이고 고정된 토대가 부재한다는 개념이다. 서양 철학에서는 사르트르나 카뮈 같은 실존주의자들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말하며, 인간이 던져진 존재로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야 하는 근원적 불안과 자유를 설명할 때 이와 유사한 사상을 탐색했다. 동양 사상, 특히 불교에서는 세상 모든 것이 상호 의존하여 잠시 생겨났다 사라지는 연기(緣起)의 법칙과,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공(空, Śūnyatā)’ 사상을 통해 이러한 무근거성의 원리를 깊이 탐구해왔다. 임상심리학적 관점에서 무근거성은 양날의 검과 같다. 많은 이들이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며 상담실을 찾는 이유는 자신이 딛고 있던 땅이 갑자기 사라지는 경험 때문이다. 안정적이라 믿었던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영원할 것 같던 관계가 끝나거나, 혹은 자신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흔드는 사건을 겪을 때 우리는 극심한 불안과 허무감, 우울에 빠져든다. 이는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5)의 특정 진단명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적응장애, 불안장애, 주요우울장애 등 다양한 정신 병리의 기저에 깔린 실존적 문제로 작동한다. 어빙 얄롬(Irvin Yalom)과 같은 실존주의 심리치료자들은 이러한 ‘궁극적 관심사’들, 즉 죽음, 자유, 고립, 그리고 무의미함(무근거성)을 직면하는 것이 치유의 핵심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무근거성의 개념은 최근 인지과학의 새로운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전통적인 인지과학이 뇌를 일종의 컴퓨터로 보고 외부 세계의 정보를 처리하는 중앙 처리 장치로 이해했다면,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Varela) 등이 주창한 ‘발제적 인지과학(Enactive Cognitive Science)’과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는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인지란 고립된 뇌 안에서 일어나는 계산이 아니라, ‘체화된 몸’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함께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즉 ‘나’라는 고정된 실체나 내면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행위와 관계 속에서 ‘나’와 ‘세계’가 함께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단단한 자아라는 근거가 없다는 과학적 통찰이며, 불교의 무아(無我) 사상과도 놀랍도록 유사하다. 흥미롭게도 바렐라 자신도 깊은 불교 수행자였다. 무근거성의 경험은 파괴적일 수 있지만, 동시에 창조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에서 쫓겨난 뒤의 공백기를 ‘내 인생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 그 groundless한 상태가 그를 옭아매던 성공의 무게로부터 해방시켜 넥스트(NeXT)와 픽사(Pixar)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게 한 것이다. 이는 마치 아무것도 없는 빈 캔버스 앞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예술가의 작업과 같다. 불교의 ‘지관(止觀)’ 수행 역시 이러한 원리를 담고 있다. 마음의 소란을 멈추고(止)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고정된 실체로 붙잡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현상으로 관찰(觀)하는 훈련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나’라는 생각의 근거 없음을 체득하게 하는 과정이다. 이는 무근거의 상태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속으로 온전히 들어가 머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평생에 걸쳐 내가 발 딛고 설 단단한 땅을 찾아 헤매는 존재일지 모른다. 안정된 직업, 변치 않는 사랑, 확고한 신념과 같은 것들로 내 삶의 기반을 다지려 애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실은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파도 위의 모래성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공포에 휩싸인다. 그러나 어쩌면 진정한 안정감이란 단단한 땅을 찾는 행위가 아니라, 발 디딜 곳 없는 허공에서 유연하게 너울대는 법을 배우는 과정 그 자체에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수영을 처음 배울 때 바닥을 찾으려는 발버둥이 우리를 가라앉게 만들고, 온몸의 힘을 빼고 물에 자신을 맡길 때 비로소 몸이 뜨는 것처럼 말이다.